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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K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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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 이니셜: LKJ
  • 신장: 182cm
  • 직업: 방송연기자, 영화배우, 연극배우

Career

장편영화
영화감독(2010) / 조연(민준)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2014) / 주연(럭키)
CF/영상광고
백세주(2007) / 단역(학생역)
휠라 스포츠광고(2006) / 단역(모델)

Comment

현재 나는 30살이다.
배우로써 시작하기에 그리 적은나이도 아니고 그렇다고 많은나이도 아니다. 
세상에는 참 수많은 직업이 있는데 왜 힘들고 위험하고 하루쉬지 않고 한달내내 한다고
해서 돈을 그리 많이 받는것도 아닌 배우의 생활을 내가 하고 있을까란 생각을 가끔씩
한다. 미래의 대한 두려움,배고픔,외로움 때문인지 주위의 사람들을 가끔씩 피하고 만나고 싶지 않을때도 종종 있다.
소재를 바꿔 과거 일단 어릴적 이야기를 하자면 1983년 8월 15일 광복절 광주광역시에서 1남 1녀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어머니,누나,나 이렇게 총 4식구다.
그 당시의 아버지는 조선대학교 정치경제학과를 졸업한후 32살 그 당시 민주당소속으로 
속해 계셨으며 어머니는 평범한 주부이셨다.
그래서인지 돌잔치때 연필을 집었다는 이유로 내 이름을 이경재라고 지으셨다
하지만 난 공부가 싫다.  아니 세상의 흐르는 변화,외교,정책,경제,정치,군사 큰 관심을 두진 않는다. 그리고 종교는 가족 모두 카톨릭신자로써 난 유아세례부터 시작해서 카톨릭 유치원 카톨릭 초등학교만 다니는 큰 신앙심 을 갖고 있는 소년이였다. 
초등학교때의 나의 모습은 언제나 항상 놀림대상 아니 또라이라는 별명이 있었다.
국어책을 읽을순간 남들이랑 얘기할 때 말을 유난히 더듬는 습관이 있었으며 어머니가 말씀하시기를 유난히 다른 아기들보다 많이 울어 한번은 목청이 나가서 병원도 갔었다고 하셨다. 그래서인지 목소리가 다른 친구들에 비해 허스키하면서 쉰목소리였다.
아무래도 변성기가 너무 빨리 찾아온것 같다.
그런 모든일들이 항상 여러 친구들의 놀림대상이자 웃음거리였다. 
그런것들도 난 챙피하지 주눅들지도 않았다. 장난치는걸 좋아하고 호기심많고 모험을 좋아해서 오히려 난 또라이로 봤을것이다.
한번은 학교에 큰 연못에 잉어들을 돌팔매질 하며 다 죽이고 야구선수가 되겠다고 운동장에 있는 짱돌을 집고 투구연습을 하다 옆에 붙어있는 수녀님실 창문 깨뜨리고 도망가고
의자에 압전을 두고 짝궁 엉덩이에 피 흘리게 할 정도로 장난이 심했다.
아무튼 한두가지가 아닌 수만가지의 만행을 저질렀었다.
난 그정도로 학교에서 또라이라 불린 소년이였다.
11살 4학년때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인해 우리가족은 이민을 가게 될 처지가 됐다.
난 바보같이 그러한 사실도 모른채 이제 그렇게 평생 한번쯤 타보고 싶었던 비행기를 타고 외국여행을 가는마냥 즐거워했다. 아버지는 비자발급과 먼저 일자리를 잡으시기 위해 10개월 더 일찍 가셨고 어머니는 당분간 자식들의 생활비,남은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 고군분투 이러저리 여러지방을 돌아다니면서 뛰어다니셨다.
누나는 서울 이모집으로 난 익산 외삼촌집으로 또 몇일이 지나면 친척들의 눈치 때문에 이리저리 누나랑 자리를 바꿔가며 헤메어 다녔다. 이런일들이 자꾸 반복되다보니 왜 다른 친척들은 저리 행복하게 자리잡고 잘 사는데 도데체 왜 우리가족만은 이민을 가야하는건지 잘 다니던 학교마저 그만 다녀야하는건지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정도로 내 마음은 삐뚤어져갔다. 눈칫밥도 더이상 먹기 싫어 친척집도 뛰쳐나가고 오히려 나쁜친구들도 어울리며 호기심에 안 피는 담배까지 펴가며 거리를 방황하였다. 그런 나의 모습이 초등학교친구 어머니가 보셨는지 나의 대한 이미지는 급속도로 학교사이에 펴져나가기 시작했다. 들리던 소문으로는 부모가 아이들 버리고 외국으로 도망갔다. 아버지,어머니 이혼문제로 인해 아이가 충격에 빠져 불량써클이 됐다는등 내 이야기는 초등학교 어머니들의 관심이슈였다.

그런 무성한  소문들만 남겨진채 난 결국 어머니,누나와 함께 한국의 정 반대편 나라
파라과이행 가게 됐다. 
한국에서 일본 일본에서 홍콩 다음에는 남아프리카 마지막 정착지 파라과이 아순시온
총 34시간이나 되는 긴 여정 마냥 즐겁지는 않았다.
시간이 지날때마다 내 마음은 초조해지고 처음으로 10개월만에 아버지를 보며 무슨말부터 해야하나 정말 내 속은 아버지를 원망했었는데 그러한 생각도 잠시 공항에 마중나오신 아버지의 모습은 왕년의 근육질에 든든한 아버지의 모습은 다 사라지고
머리는 다 빠져서 없고 살이 빠져 야윈 아버지의 모습을 본 순간 더 이상 아무말도 하기 싶지가 않았다. 
파라과이란 나라 한국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나라다.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어디야란 말만 들을뿐 그 파라과이란 나라자체는 무슨언어를 쓰며 사람들은 어떠한 인종이며 역사 주식등 전혀 알지 못했다. 정말 왜 우리가족이 미국,캐나다,유럽 선진국들을 두고 이런 말도 안되고 답이 안 나오는 거지같은 드러운 나라에 왔는지 도무지 이해하기 싶은 마음도 업었다.
시간이 지날때마다 부정적인 생각만 들뿐 아버지의 증오심만 커져 나갔다.
한국교포들만 어울리면 절대 이나라에 적응할수 없다는 이유로 부모님은 순정 정말 꼴통들만 다닌다는 원주민학교에 날 입학시켜셨다.
처음 들어갈 때 나의 모습이 그리 신기했는지 동물원의 야생동물 쳐다보듯이 날 힐끔힐끔 쳐다보며 날 하나씩 비웃기 시작했다. 무슨욕을해도 난 그게 욕인지 인사인지도 모른채  난 웃기만했다. 그런모습조차 그친구들 눈에는 거슬렸는지 그 이후로 날 헐뜯기 시작했다.
이런학교를 내가 8년을 다녀야하나 아니 사회생활도 여기서 해야하나 정말 비참하다.
하루빨리 사고를 치든 뭔짓을 해서 한국으로 다시 가야되겠다는 생각뿐 
정말 향수병이란 이런것인가 정말 내가 살던 한국이 그리웠다. 아무리 교포친구들과 소통을 해도 내 마음을 파라과이2세인 그들이 이해할순 없었다. 
왜 이리 난 이 파라과이나라 사람들과 소통하고 공감하기가 어려웠나 단순히 언어가 이유가 아니다. 그냥 싫다. 이나라 자체가 아니 아버지도 모든게 다 싫었다.
아버지가 그냥 욕하고 때리면 오히려 용서를 구하기 보다 대들고 집 나가기가 일쑤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왜 그랬는지 그때의 내 정체성을 도무지 찾을수가 없었다.
그냥 혼자 있는게 심적으로 치유가 됐다. 사람들 만나기 싫어 집에 갇혀 있었고
학교도 가는척하며 아버지가 어머니가 일 나가시면 혼자 집에 들어와서
나만의 놀이를 즐기며 오타쿠 생활을 하는 중학교시절을 보냈다.
중학교 졸업식을 하지도 못한 채 우리 가족은 또 다시 그 옆 동네 브라질이란 나라로 이민을 가게 됐다. 그래도 브라질은 남미의 거대한 대륙으로써 세계경제의 중심국가 브라질이였다. 이 나라로 이민을 간 순간 이후부터 고등학교시절 나의 모습 정말 어떻게 보면 내가 느끼기에는 화려했던 3년이였던 것 같다. 또 나에게 있어서 뚜렷한 목표 의식이 생기기도 하였다. 일단은 학교에서는 Coreano roco problema란 수식어라는 명칭이 붙었다. 미친 한국인 문제아였다. 1학년때는 성의 눈을 제대로 뜨기도 한 시기이기도 한 동시 나에겐 새로운 파라다이스였다. 평생 잊을수 없는 친구 그 파라다이스를 자체를 나에게 통째로 심어준 친구 pablo라는 친구였다. 아버지는 브라질인이였고 어머니는 일본인이였다. 아버지는 현재 브라질에 큰 샾 몇 개를 가지고 부자였다.. 


일단 난 다혈질이자 한마디로 학교에서는 파이터였다.
브라질 민족 또한 다혈질이다.
극소수가 아닌 대부분이 나랑 같은 다혈질이다.
일단 시비가 붙으면 무조건 주먹이다.  싸움은 방과 후 옥상이거나 축구 경기장 한가운데다. UFC를 하는것 마냥 내 싸움은 모든사람들의 큰 구경거리이다. 
어릴때부터 많이 맞아본 사람만이 똘끼와깡이 있듯이 나 역시 그렇다. 거기다 한번 물고 늘어지면 절대 놓지 않는 끈질김까지 가지고 있다. 
같은 고등학생이라도 골격 체격자체보다 차이가 나는데 난 그당시 뼈 밖에 없는 말랑깽이
왠만한 브라질친구들은 평생 고기만 먹고 살았는지 온몸이 근육질이었다.
그런 떡대에게 난 모든사람들이 지켜본 가운데서 피 터지게 맞고 심지어 그 무리들한테
침까지 맞고 오줌까지 맞아가며 눈물과 치욕을 남겼다. 
정말 학교에다 아무리 억울함을 호소해도 한국인의 차별로 잘 들어주질 않았다.
Pablo란 친구가 느닷없이 나타나 나의 정학을 막아주었다. 
거기다 섹스,대마초,폭력등을 즐기는 친구였다.
한번은 학교에 키 170쯤에 긴 금발머리와 글래머 몸매를 가진 Claudia란 한 여학생이 있었는데  그 친구를 볼때마다 자꾸 섹스가 하고 싶었다. 
고로 인간은 누구나 한번쯤은 삶의 대한 욕망이 있는데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행위중의 최고가 섹스가 아닐까란 생각을 심어준 여자이다.
정말 브라질은 여성우월주의고  여성 중심적으로 이루어지는 나라라는 생각이 든다.
정말 오히려 남자보다 모든일에 적극적이며 지성과 미모를 가진 글래머스런 여자
난 그런 솔직 담백한 브라질 여자들이 좋다. 의외의 모습에 적극성인 가진 글래머스런 여자 랑 갖는 섹스가 좋다. 어떤 남자들이 그런 매력적인 여자들을 마다하겠는가.
한국여자들도 예전보다 어느정도 개방적이긴 하지만 아직은 브라질 여자들과는 비교대상이 아니라 생각한다. 한국여성들도 그만큼 다른 매력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고등학교 3학년이 될무렵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외국어 장점을 살려 외대를 가야하나 아니면 이공계 이점을 살려 누나를 따라 건축과를 갈까 대학교 전공 하나에 앞으로 내 인생이 달라질 수도 있는다는 생각에 큰 숙제와 고민을 갖게 됐다. 긴 고민 끝에 결국 답을 내린게 연극이였다.
어머니가 당연히 좋아하실리도 없고 허락하시지 않았다. 연극이란 단어자체만으로 큰 거부감과 부정적인면을 가지고 계셨다. 하지만 아버지만큼은 아들의 미안함때문인지 내가 하는일에 항상 내편이 들어주시며 큰 힘이 되어주셨다. 아직까지 과거의 좋지 않은 약간의 미련때문인지 아버지랑 그리 가깝지 소통하며 지내지 못하지만 아버지는 떠나가며 이런말을 해주셨다. 한국에서 앞으로의 수많은 경험과 날들이 너를 새롭게 태어나게 할 거다 그게 연극이자 배우라고 하셨고 신부님도 또한 그러셨다. 시몬아 브라질이란 나라가 한국보다 크고 넓지만 오히려 한국을 나가게 됨으로써 세상을 보는 지혜가 많이 생길것이며 보다 많은 걸 얻게 될것이라고 그리고 연극을 함으로 시몬의 작은 틀에 벗어날것이다란 짧은 말씀을 해주셨다. 처음에는 정말 멋진 배우 성격창조해서 다시 태어나겠다는 생각으로 뜨거운 열정하나로 한국을 10년만에 들어가게됐다.


연극과 하면 중앙대와 동국대 서울예대 한예종등 외 정말 많다.
지금은 어는 대학교든 연극과는 다있지만 2003년만 해도 연극과는 드물었다.
먼저 중앙대 동국대 서울예대 어디 대학든 연극과만 있다면 다 가고 싶었다.
막상 학교를 들어가니 내가 상상한 현실과는 거리감이 있었다.
정말 내가 연기를 배우고 있긴 한건가 외국에서 왔다는 이유로 또 무시 당하고 
하고 싶은것도 못하고 하기 싫은건 억지로 끌려 다니며 하며 자꾸 오디션은 한국어가 너무 부족하다 공부하고와라 그 소리뿐이였다.
그렇다 계속 이렇게 불만 불평만 가지면  중,고등학교때와 다를바 없다.
난 스타가 되려고 한국에 온게 아니다. 배우 즉 인간이 되기 위해 왔다.
앞으로 군대도 가야하고 배신,아픔,사랑,이별,죽음상처 이런 모든 경험을 다 가져야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할것이다라는 생각을 자주 해왔다.
22살전까지 나의 대학생활은 수동적인 일을 해가는 아웃 사이더였다.
그리고 바로 군입대를 하게 되었다. 남들은 외국영주권자데 군대를 왜가냐 뺄수 있지 않냐
나 같으면 안갔다 병신 그런말을 했지만 차라리 오히려 군대를 일찍 다녀온게 과거 또라이 문제아 이경재를 어느정도 버리지 않았나라고 생각한다.
30살인 지금의 내모습이 인생 전부는 아니지만 현재 소설의 가상현실이 아닌 실제현실을 살고 있고 이제는 그만큼 내가 살았던 모습을 통해 무엇보다 값진 인생경험을 얻었다고 본다.

배신,사랑,믿음